finding my own journey

사사롭고 진솔한 여행 가이드

finding #london 자세히보기

Other Countries/JAPAN

홋카이도 - 폭설의 기억

사사로운 여행 가이드 Mauvais sang 2021. 2. 23. 22:40

여행의 변수, 기상악화

짧은 여행에서 기상악화는 근심과 손실의 근원이다. 일정이 지체될수록 미리 지불을 완료한 숙박비나 차량 렌트 비용 등등 손실이 몸집을 불린다. 예약 건건 자료 조사에 수일 이상 쏟아부었던 정성이 수포가 되는 순간, 가장 큰 타격은 여행의 기대감이 바닥을 찍는다는 데에 있다.

해외여행이라면 더욱 심각하다. 귀국을 앞둔 기상악화는 그나마 나은 편, 출국을 앞두면 심리전이나 다름없다. 일 분 일 초 예측불가로 전개되는 상황은 희로애락, 인생의 압축판이 돼 버린다.

 

'오타루비어 남바원(小樽ビール醸造所 小樽倉庫No.1)' 전경이다. 중력에 이끌려 자라난 고드름의 모양과 기세가 인상적이다. 운하 옆에 위치하고 있고, 이름대로 창고에 가게를 연 양조장 겸 맥주집이다.

구글맵 『오타루비어 남바원』 정보 보기

 

예전에 도착 국가의 기상악화로 내 탑승편이 한국으로 출발하지 못한 적이 있었다. 한국에 도착해 다시 승객을 싣고 회항하는 식인데, 현지의 기상 여건이 나아지려면 반나절 정도 소요될 예정이었다. 다행히 한국발 항공 운항은 가능한 상황이라 난 해당 항공권을 포기하고 다른 항공기에 탑승해 일정과 비용의 손실을 최소화했던 적이 있다.

저 정도도 양호하다. 2012년 12월 29일 늦은 오후, 홋카이도 지역에 내린 폭설로 항공 일정이 모두 취소됐다. 서둘러 출국심사를 마친 상황에서 하릴없이 운항 재개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 다음 날 새벽까지 생에 처음 공항에서 노숙했다, 첫 단추를 잘 꿰야한다는 옛말이 그르기를 바라며…….

설경은 절경

다행히 어렵게 도착한 홋카이도는 절경이었다. 새우잠으로 고갈된 체력에 호텔 1박과 한나절 일정을 날렸지만, 눈 앞에 펼쳐진 설경은 모순되게 위로가 됐다. 성인의 키 높이만큼 쌓인 눈, 거대하게 매달린 고드름과 땅땅하게 빙판이 깔린 도로, 기어다니는 차량과 펭귄처럼 뒤뚱 대는 인파들……. 어차피 이런 조건에서 빡빡한 일정을 쫓는 여행은 불가능했다.

 

12월 29일에 도착했어야 하는 삿포로에 다음 날에 도착했다. 이미 점심시간을 지나서였고, 계획대로라면 삿포로 맥주 박물관에서 양고기 요리인 징기스칸을 먹고난 후 디저트로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어야할 시간이었다. 현실은 호텔을 향해 걷고 있었지만, 단어 그대로 설원을 헤매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간밤의 폭설로 성인 키높이의 눈덩이가 도시를 뒤덮고 있었다. 태어나 이토록 거대한 양의 눈은 처음이었다. 도로는 얼어 빙판이 되었고 대부분의 차량들은 바퀴에 스노우체인을 감고 서행했다. 익숙한 듯 안전화를 착용한 시민들도 살금살금 걸음을 옮겼다. 폭설은 모든 것의 속도를 늦췄다, 그것도 아주 우아하게!

삿포로 맥주박물관,サッポロビール博物館

삿포로 맥주박물관에 오후 늦게 도착했다. 일요일 늦은 오후였는데 관람은 하지 않았다. 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냥 지나칠리 없는데, 바닥난 체력 때문이었는지 안내센터만 잠시 구경하곤 양고기에 맥주 몇 잔 하러 갔다. 당시만 해도 여행을 포기한 심정이었으리라.

양배추와 숙주를 얹은 양고기의 맛이 잊히질 않는데, 희한하게 맥주 맛은 기억에 없다. 양조장에서 갓 뽑은 신선한 맥주라며 감탄까지 해놓고선! 징기스칸이라는 요리의 양고기 맛을 기억하는 것은 미숙한 조리 탓에 태우기 일쑤라 맛있게 구울 수 있기까지 꽤 오래 걸렸기 때문이리라. 작은 화구와 철판에 비해 산더미로 쌓아 올린 채소 때문에라도 일본인이 아니면 조리가 힘든 것은 어쩔 수 없었다.

 

2012년 당시에는 지금처럼 한일관계가 냉랭하지 않았고 불화의 초기였기에 일본문화에 대해 비판없이 받아들였고, 우리보다 몇 배나 우월한 선진국이라고 생각했다. 일본정부의 지속적인 한국 때리기와 몰염치로 인해 극적으로 전향했지만……. 빠른 시일 내에 일본이 제대로 사과하고, 한국이 포용해 우호적이고 발전적인 양국관계로 나아가길 고대한다.

구글맵 『삿포로 맥주박물관』 정보 보기

여행 내내 폭설과 함께

1월 1일 출국일까지 3일 내내 눈을 맞으며 다녔다. 눈을 맞으며 삿포로 TV 타워 앞에서 새해 카운트다운을 했고, 누구나 가질법한 雪中露天溫泉의 꿈도 이뤘고, 아사리에끼(朝里駅)에선 택시를 잡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다 한류팬의 차를 얻어 타기도 했다. 눈보라 휘날리는 오타루 운하에서 인증 사진도 찍고, 스노우체인을 단단히 조여 맨 택시도 한껏 타봤다.

 

12월 31일 오타루의 여정을 소화했다. 오르골 박물관이 목적지였는데 아사리를 경유해 온천도 즐길 계획이었다. 삿포로역에서부터 눈발이 날리더니 아사리역에 가까워질수록 휘몰아치는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역에 내려 온천까지 이동할 차편을 구해야 했는데 전방의 시야도 확보하기 어려운 대설이라 역 주변에는 택시는 물론 사람조차 없었다. 버블경제의 몰락으로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는 역이어서 도움을 청할 길조차 없었는데, 5분 정도 걸었을까? 멀리서 차 한대가 천천히 주행 중이길래 손을 흔들었더니 흔쾌히 온천까지 태워줬다. 
자신을 이영애의 팬이라 소개했던 40대 여성은 한국에서 온 내게 꽤 호의를 보였고, 이에 보답하고자 삿포로역 '카페 덴마크'에서 구매한 디저트를 몽땅 그 분께 드렸다. '고라쿠엔(宏楽園)' 온천에 도착했을때 그 선한 사마리아인은 나를 차에서 내려놓고도 몇 번의 인사를 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이면 이어지는 그녀의 답례가 열 번 정도 계속됐다. 분명 고마운 것은 나일텐데, 그 분이 이토록 자리를 뜨지 못하는 것이 딱히 '카페 덴마크'에서 사온 비싼 빵때문은 아니었으리라.
대설로 이동이 느려진 탓도 있지만, 눈에 정신이 팔려 사진만 찍어대다 결국 오르골 박물관에는 입장조차 못했다. 대신 근처 '月下美人'이란 수제 기념품 가게에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작품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메인 테마인 '인생의 회전목마' 몇 소절이 연주되는 작은 오르골과 유리공예품을 샀다. 2012년의 마지막날이라 그런지 많은 가게들이 일찍 문을 닫아 저녁식사도 스시 몇 개로 떼우고 막차에 몸을 싣고 삿포로로 돌아갔다.

눈은 새해를 넘기도록 내렸다. 타국에서 맞이하는 새해의 낯섦은 고국과 다름없었다. 어떤 기분일까 꽤 궁금했는데, 어디에 있더라도 또 다른 내가 되고픈 욕망은, 그리고 그게 실현될 리 없을 것이라는 비관과 신속한 수긍은, 결코 친숙해질 수 없었다.

말일이라서 거리엔 불타오르는 청춘들만 보였다. 그들의 대다수가 대뜸 나를 보고 '해피 뉴 이어!'라 소리쳤고 나 역시 큰소리로 화답했다. 귀국 비행 일정이 취소될지도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 잠을 잊은 채 새해인사를 나누며 한참 동안 새벽 거리를 배회했다. 한국에서는 겪어보지 못했던 유쾌한 감정이었고, 동시에 완벽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평소라면 도전하지 않았을 것들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마음을 비우니 고개만 돌려도 명미한 풍광이 보이고, 닿는 곳마다 명소가 됐다. 폭설은 어쩌면 행운의 증표였다. 여행의 쉼표를 즐기게 만드는 여유의 근원이었다.

 

12월 31일 세밑 삿포로 거리 풍경이다. 풍경은 달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끝.

본편만큼 재밌는 홋카이도 - 폭설의 기억 (부록편) 보러 가기

홋카이도 - 폭설의 기억 (부록편)

 

홋카이도 - 폭설의 기억 (부록편)

폭설에 대한 홋카이도의 기억을 되짚다 엄청난 양의 음식 사진을 발굴(!)했는데, 이를 효과적으로 처치할 방법을 고민한 끝에 이 글을 쓰기로 했다. 사진의 나열에 가깝지만……. 되도록 위산과

www.cityhunter.wor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