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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th Korea/서울

뚝섬한강공원 - 겨울산책

사사로운 여행 가이드 Mauvais sang 2021. 2. 23. 20:10

거리두기 2.5단계의 낙, 공원 산책

11월부터 이어진 거리두기 2.5단계로 애정하는 카페는 물론 마스크를 벗어야 하는 식당에도 갈 수 없어 답답한 와중에, 그나마 서울과 근교의 공원들이 숨통을 터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다. 밀폐된 실내가 아니니 감염에 대한 부담도 적어 때와 장소만 잘 고르면 붐비지 않고 한적하게 산책을 즐길 수 있는데, 편의시설을 잘 갖춘 공원이 많아 대상을 물색하고 선정하는 등 소소한 채비만으로도 그간 억눌려왔던 여행의 욕구를 조금이나마 충족할 수 있다.
정오를 넘긴 금요일 오후, 2년 전 강추위에 얼어붙은 한강을 떠올리곤 뚝섬한강공원으로 목적지를 정했다. 경자년 세밑을 지나며 열흘이 넘도록 한파와 폭설이 이어져 지박령 수준이 다 되어버린 터라 오랜만의 외출은 꽤 설레고 흥분되었다. 게다가 이토록 푸른 하늘이라니! 티끌 없이 말간 하늘은 투명하고 쨍해 운전하는 내내 여과되지 않은 햇볕을 내 얼굴에 온통 쏘아대고 있었다.

눈의 왕국, 뚝섬한강공원

거리도 가깝고 주차시설도 준수해 별 다른 걱정 없이 출발했는데, 도로 곳곳엔 아직 눈이 얼어붙어 차량 운행에 주의가 필요했다. 심지어 뚝섬제2주차장은 제설작업이 이뤄지지 않아 눈밭 위에 주차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폭설로 일당을 포기한 상용차들이 늘어서 있었지만, 군데군데 빈자리도 있어 쉽게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다.

 

뚝섬제2주차장(왼쪽 사진)에서 내리면 한강과 바로 연결되어 있다. 공원 벤치(오른쪽 사진) 부근에서는 설원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온 신경을 집중해 차를 세우고 맞이한 차 밖의 풍경은 흡사 테마파크 초입에 들어선 착각을 일게 했다. 눈 앞에 펼쳐진 설원은 하늘과 땅을 구분하는 지평선이 되어 강 건너 도도했던 마천루도 빛을 잃게 만들었다. 시원했다. '눈이 쌓인 한강 주변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이 있던가?' 새삼 한강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며 난 무심했던 사람이 되어 버렸다.

롯데월드타워와 영동대교 사이

습관인 양 롯데월드타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반지의 힘에 이끌려 사우론의 탑으로 향하던 프로도의 기분이 이랬을까? 강남이든 경기도든, 어느 곳에서든 볼 수 있는 높다란 저 건물은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내 이정표가 되어 버렸다. 서울양양고속도로든 외곽순환고속도로든 저 타워가 보이면 집에 거의 다다랐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받은 지 오래니까. 맨꼭대기 전망대의 이름이 '서울 스카이(Seoul Sky)'니 이쯤 되면 내가 저 건물을 향해 걷지 않는 게 더 희한할 것 같다.
드문드문 걷는 시민들이 보였지만 대체로 공원은 한산했다. 지대가 높은 공원 밑으로 자전거 도로가 나 있고, 그 밑으로 수변에 접근할 수 있는 산책로가 설치되어 있어, 공원 주변은 3단 또는 2단의 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한강을 내려다보는 각도가 달라 층마다 느껴지는 분위기가 조금씩 달랐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건너편 강남의 건물들이 물 위에 뜬 섬처럼 느껴졌다.
타워 방향으로 걸으며 공원을 벗어나자마자 왼쪽에 수상레저스포츠 타운이 나타났는데, 물가에 보트며 보드를 쌓아둔 모양새가 꽤 초라했다. 얼어붙어 결박된 선체는 한 여름 정열과 젊음을 과시했던 장면들과 겹치며 비극적인 정서를 드러내고 있었다. 여름이 오면 다시 부활할 테지만…….

 

수상 스포츠와 별다른 인연이 없어 그간 뚝섬한강공원에 많은 업체가 입주해 있는 줄 몰랐다. 대략 열 곳이 넘는 가게들이 늘어서 있었고, 가게 앞 수변에는 어김없이 여러 대의 보트와 보드들이 묶여 있었다.

잠실대교를 앞에 두고 수변과 맞닿은 산책로로 방향을 돌렸다. 사우론의 탑을 등지면 멀리 영동대교가 보인다.

눈을 치우지 않아 인적이 더 드물어 사색하기 좋은 공간이었다. 차디 찬 한강의 기운이 바로 전달돼 조금 더 쌀쌀했지만, 햇살이 빙판에 부딪혀 산란하는 통에 무지개 속을 걷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게다가 뽀드득 거리며 무너져 내리는 눈밭의 유쾌한 소리는 최면을 걸어오는 듯했는데, 눈밭에서 미끄러질라 조심스레 바닥을 딛는 발가락이 긴장감에 점령당했다 땅에 닿는 순간 이완되고는 다시 발걸음을 떼자마자 긴장감에 지배당하는 사이클을 반복했다. 넘어지지 않으려는 나의 본능이 '똑딱똑딱' 시계추마냥 다리를 움직였다. 딴생각할 겨를이 없으니 걷기 명상이 따로 없었다.

 

우월한 높이 덕에 롯데월드타워는 수면 위에 또렷하게 반영된다(왼쪽 사진). 반면 영동대교 방면엔 낮은 층고의 건물들이 주를 이루고 있어 조금은 심심한 스카이라인을 보여준다(오른쪽 사진).

청둥오리와 오리배, 한강의 메타 유머

그렇게 하염없이 눈밭 위에 족적을 남기는데 후드득 날갯짓 소리가 들려왔다. 빙판 위에서 볕을 쬐던 청둥오리 새끼들이 인기척에 놀라 빙판 위를 날듯 뛰어다니는 소리였다. 어미와 아비는 먹이활동을 나갔는지 너른 한강 위에 새끼들만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내빼는 바람에 제대로 된 사진을 찍지 못했는데, 발육이 덜 된 날개를 편 채 빙판 위를 허둥지둥 달리다 미끄러지는 모습이 애처로워 촬영을 포기했다.

 

아무리 숨을 죽이고 다가가도 녀석들의 생존본능을 이길 수 없었나 보다. 도망치다 자빠지는 게 버스터 키튼을 연상시킬 정도로 우스꽝스러웠지만, 저들 입장에서 나는 맹금류 다음으로 경계해야 할 악당인 셈이니 눈물 겨운 생존 현장이 되어 버렸다.

청둥오리에 대한 관심을 거두고 발길을 돌렸다. 한강이 내게 던지는 유머일까? 근처에 오리배가 무리 지어 있다. 요트 모양의 건물인지, 건물을 가장한 요트인지 알 수 없지만, 편의점과 레스토랑이 입주해 있는 아리랑하우스 앞으로 오리배들이, 말 그대로 발이 묶였다. 꽁꽁 언 한강 위 나른한 오후의 볕을 받으며 열과 오를 맞춘 오리배들의 반복적인 모양새가 묘하게 편안함과 나른함을 전해줬다.

 

은빛 호수 위의 백조처럼 우아한 자태의 오리배들이 인상적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영동대교에 가까워질수록 한강은 더욱 광범위하고 단단하게 얼어붙고 있었다.

소확행, 코로나 19 시대의 행복

한 시간 가량 대략 2.5km를 걸었다. 기온계는 영하 11도를 가리켰지만 따뜻한 햇볕과 롱 패딩 덕에 그리 춥다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도 롱 패딩은 이런 날에 입으라고 개발한 옷이겠지' 확신을 갖게 만든 경우랄까.
뚝섬제2주차장에 마련된 공동화장실에 들렀는데, 청결한 것은 둘째치고 온기 가득한 실내 기온과 뜨거운 온수에 놀랐다. 새삼 일등국가에 살고 있다는 자족감이 끓어 넘쳤다. 주차정산을 하고 보니 일반차량의 경우 1시간에 900원의 요금이 책정되어 있었다. 1시간을 약간 넘겨 두 배를 지불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30분 정도 더 소일할 걸 그랬다.
솔직히 평소라면 시도하지 않았을 법한 외출이었다. 아마도 조금 더 거창하게 계획을 짰을 테다, 호텔이며, 식당이며……. 하지만 다음엔 큰 눈이 오면 걸어서라도 이곳에 와야겠다는 다짐을 할 정도로 뚝섬한강공원은 구석구석 장점이 넘치는 좋은 여행지였다.
코로나 19로 흉흉한 요즘 사소한 일이 감동이 되는 마법을 경험하고 있다. 이도 그다지 다르지 않겠지만, 오히려 일상이 더 소중한 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데에 감사하고 행복할 따름이다.

끝.